By Published On: 2022년 11월 4일Categories: 문학, 수필0 Comments on 첫 가을(1922, 방정환)

첫 가을(1922,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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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 밤의 하늘은 깨끗한 푸른 유리처럼 깊게 곱게 개인다.
동남쪽 장충단 저 너머로 떠오르는 달은 상긋한 푸른 빛을 띠운 거울같이 맑고도 환하게 빛난다.
이런 때 벌레 우는 뒤뜰이나, 마루 끝에 앉아서 달 구경하는 재미, 달 구경에 지치면 방에 들어가서 산뜻하게 찬 방바닥에 몸을 대고 애독하는 책을 펴고 조용히 옛사람의 시를 읽는다. 그러면 어느 틈에 방구석에서도 가여운 벌레가 울기 시작한다. 이것이 여름내 피곤한 마음의 조갈을 추겨 주는 밤이슬같이 단 것이다.
봄에 봄꽃 여름에 여름꽃이 있는 것과 같이 가을에도 가을꽃이 있다. 그리고, 가을에 피는 꽃은 대개 쓸쓸스런 풍정을 가지고 있다. 국화, 과꽃, 무궁화, 달리아, 도라지꽃, 코스모스 모두 다 쓸쓸스럽게 피는 가을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코스모스처럼 가을 기분을 잘 나타내는 꽃은 없다.
헌출하게 가늘게 길게 자란 줄기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좌우로 가는 가지가 나가고, 그 가는 가지가 뻗어 나가서 그 가느다란 끝마다 말쑥하고 어여쁜 꽃이 방긋방긋 피어난다. 가을날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두 손길 마주잡고 무언지 애원하는 처녀의 눈동자와 그 몸씨 같은 가지나, 꽃이나, 복성스럽고 귀여운 것이 가을 일기같이 산뜻하고, 쓸쓸하고, 애처롭게 가여워 보이는 순진, 바로 그것이다.
열 칠팔이나 되도록 크게 자라면서 탐스럽게 몸이 퉁퉁해지지 않고, 멀쑥하게 키만 자란 허리 가는 시골 색시 ─ 웃고 떠들고 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울타리 뒤에서 얼굴 붉히는 촌색시 같은 가엾게 사랑스러운 꽃이다.
코스모스를 사랑하는 고로 우리 집 마당에도 분에 심은 것이 지금 활짝활짝 피어 있지마는 나는 언제든지 코스모스를 보면, 넓은 잔디 뜰, 시골 길, 쓸쓸스런 울타리 밑, 볕 잘 드는 시골 정거장 마당 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코스모스의 뿌리 있는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벌레들이 우는 것도 생각한다.
분에 심긴, 이것은 들이나 울 밑에 제대로 피어 있는 것에 비하여 코스모스다운 맛이, 반 이상이나 감해졌다. 그러나, 흙 냄새를 못 맡는 도회 생활에 고달피 쫓기는 몸에는 이 분에 심긴 변변치 않은 것에도 오히려 상긋한 풀밭에 가을 맛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조그만치의 위안은 되는 것이다.
가을은 먼저 ‘바람을 보고 안다.’하고 싶다.
바람이 가을 경치를 보이는 것은 아무리 해도 넓은 들 벌판이다. 머얼리 멀리 시원스럽게 멀리 펼쳐 있는 벌판에 풀들이 바다의 물결같이 흔들리면서 한들한들하는 잔잔한 소리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전해 보낼 때 가을이 찾아온 것을 그 풀바람 소리 속에서 듣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 경치는 바람 소리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빛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넓은 들에 늙어 가는 풀빛이 은연히 가을 바람을 채색하는 것이다.
가을은 풀숲에서 나타난다. 그 풀빛 속살거림이 사람의 마음에도 가을을 낳게 한다.
보드라운 어머니의 품에 어린 아기가 안겨 있듯 늙어 가는 풀숲에서 가을이 젖을 먹는 것이다.
가을은 시골에 있어도 좋고 도회에 있어도 좋다. 집에 있어도 좋고 거리로 다녀도 좋다. 드러누워도 좋고 일어나서 걸어도 좋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좋고, 병인에게도 좋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만치 은혜 많은 철이 가을이 아니겠느냐. 어느 해든지 가을은 몹시 기다려지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가을부터는…….’ 하고, 여름철 더운 때부터 계획할 일, 여행할 일, 이 일, 저 일 미루어 가면서 고대고대하는 동안에 가을은 오는 줄 모르게 옆에까지 와 있다. 금년에도 그렇게 가을이 왔다. 달이 밝고, 벌레가 울고, 풀이 늙어서 가을이 온 것을 알면, 여러 가지 기다리던 일이 한꺼번에 바빠진다.
그러나 아직도 가을은 젖을 먹는다.
단풍잎이 새빨개졌다가 다시 누르러서 낙엽이 지기는, 아마도 시월 그믐께가 될 것이다. 그 안에 바쁜 일을 모두 치워 놓고 재미있고, 생신한 가을 여행의 길을 떠나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바람에 불리는 코스모스 모양대로 그립던 넓은 벌판에 서서 가을 바람에 불리우는 쾌미, 정거장마다 쓸쓸히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는 재미, 아아, 내 마음은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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